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23세 (문단 편집) ==== 교황청 외교관 ==== 1925년(43세)에는 주(駐)[[불가리아]] [[교황청]] 순시자로 임명받았다. 교황청 순시자가 [[신부(종교)|신부]]여서 권위가 없다는 이유로 [[주교]]로 서품받았지만, 이것은 안젤로가 교황청이나 [[이탈리아]] 종교계에서 힘을 얻지 못하도록 좌천시키는 작업이기도 했다. 불가리아처럼 가톨릭 신자가 소수인 나라로 가는 교황청 외교관은 한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 파견된 순시자는 무려 6백 년 만에 불가리아로 가는 교황청 외교관이기도 했다. 안젤로는 [[외교관]]으로 임명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이유는 크게 2가지인데, 하나는 본인이 신자들 속에서 일하는 사목자를 바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교관이 되면 누이들을 하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론칼리 집안이 가난하므로, 안젤로는 누이들을 자기 일을 돌보는 하녀로 두어 월급을 주었다. 성직자든 뭐든 론칼리 집안에서 그래도 가장 성공한 사람이 안젤로라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도와달라 돈을 부쳐달라는 부탁을 많이 들었으므로, 가족들을 돕는 일환으로 누이들을 하녀로 두었던 것. 그런데 외교관이 되어 해외로 나가버리면 더 이상 누이들을 하녀로 둘 수 없고, 따라서 월급도 줄 수 없으므로 꺼렸다. 하지만 결국 외교관이 되었다. [[불가리아]] [[정교회]]는 [[교황청]] 순시자로서 부임하는 안젤로를 두고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정교회를 전복시키려는 음모'가 있을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안젤로는 불가리아에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의혹들을 피하려 노력했고, 불가리아의 [[가톨릭]] 하층민들을 껴안고자 애썼다. 당시 불가리아 가톨릭은 [[프랑스인]] [[사제(성직자)|사제]]들이 이끌었는데, 전례에서 기도도 [[불가리아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했다고 한다. 안젤로는 '불가리아어로 기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불가리아 정교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쌓고자 노력했다. 당시 불가리아 국왕 [[보리스 3세]]가 이탈리아 공주 조반나의 결혼 문제를 두고, 안젤로는 교황청의 대리인으로서 양측을 조율해야 했다. 보리스 3세는 정교회 신자로서 정교회식으로 결혼하고 아이들에게 정교회 세례를 주고자 했으나, 당연히 조반나 공주와 교황청은 반대했다. 처음에는 보리스 3세가 교황청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듯하였으나, 결혼식 당일에 기습적으로 정교회 [[혼인성사|결혼성사]]를 거행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도 왕비로부터 아기를 빼앗아 정교회 세례를 주었다. 이 일로 안젤로는 교황청에 소환되어 질책을 받았다. 1935년(53세)에는 [[터키]]/[[그리스]] 주재 교황 대사로 임명받아 [[불가리아]]를 떠났다. 당시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터키 정부와 쓸데없는 마찰을 피하기 위해 과감하게 공식 문서에 [[터키어]]를 도입, 터키 정부와 유화적인 관계를 맺는데 성공했다. 이 시기에 불필요한 [[어그로]]를 끌지 않고자 성직자의 복장인 [[수단(의복)|수단]] 대신 평범한 양복을 입었는데, 한 번은 양복을 입은 자기 사진을 어머니에게 부치면서 "양복을 입은 주교 아들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스탄불]]에서 그는 국제 정세와 각종 국가들의 정보들을 입수해서 교황청에 보고하는 역할도 맡았다. 한편 터키에서 [[미사]]를 드리며 성경을 [[터키어]]로 읽거나, [[라틴어]] 전례문을 읽다가 터키어 기도문을 짧게 덧붙이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듯, 이때의 가톨릭 교회의 [[전례]]([[미사]]를 포함한 [[7성사|일곱 성사]], [[성무일도]] 등)는 성경이나 전례문이 모두 [[라틴어]]였으니 안젤로의 이러한 조치는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항의하거나 또는 로마에 알렸다. 안젤로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나오는 반발을 보고, 겉으로는 어떻든 속으로는 상당히 상처를 받은 듯하다. 한편 그리스에서는 안젤로가 활동할 때마다 정부가 감시요원을 붙였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교황청과 무솔리니가 동맹을 맺었다 여기고, 교황청 대사가 '무솔리니의 끄나풀'이 아닐까 의심했다고 한다. [[터키]]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리스에서는 정말로 언행 하나하나에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또한 가난한 가족들에게 어떻게든 돈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성직자로서 받는 월급을 쥐어 짜야 했다. 35년/39년에는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망하여 슬퍼했다. 사적으로 공적으로 힘든 와중에도 [[동방정교회]]와 화해를 적극 모색한 덕에 1937년 안젤로가 교회일치위원회를 방문했을 때 큰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불가리아든 터키든 그리스든 모두 가톨릭이 소수종교인 지역이라, 교황청 대사로서는 한직에 불과했다. 1944년(62세)에 [[프랑스]] 주재 교황청 [[대사]]로 임명되었는데, 처음 소식을 듣고 명령이 잘못 전달된 줄 알기도 했다. 한직만을 맴도는 자기가 갑자기 프랑스 주재 대사라는 요직[* [[프랑스]] 주재 [[교황청]] 대사가 요직인 이유는, 당시 [[가톨릭]] 신자 비중이 매우 높은 프랑스에서 프랑스 주재 대사에게 각 [[교구]]의 [[주교]] 후보 추천권이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는 각국에 파견된 교황청 대사가 파견국 교구들의 주교 후보 3인을 교황청에 추천하면 [[교황]]이 그중 1명을 임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당연히 프랑스 주재 대사가, 가톨릭 인구가 거의 없는 [[터키]] 주재 대사보다 훨씬 요직이다.]에 임명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안젤로가 임명된 것은 당시 교황 [[비오 12세]]가 처음 프랑스 대사로 생각한 [[성직자]]가 건강상 이유로 임명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직만을 맴돌긴 했지만 가는 곳마다 온후하게 일을 처리했다는 평을 듣는 안젤로 주교를 프랑스 대사로 임명했던 것. 이 사실을 알고 안젤로는 '''"[[말(동물)|말]]이 없으면 [[당나귀]]라도 일해야지."'''하고 자조했다고 한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에 좌파 사상의 영향을 받은 신자, 성직자들이 제법 있었으므로, 역시 적당히 그쪽 물이 든 안젤로가 파견되면 잘 다독거릴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외교관]]'이란 말을 들었으며, 외교관으로서뿐만이 아니라 또한 [[주교]]로서 프랑스의 본당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붙잡힌 [[나치 독일]] [[포로]]들의 공정한 처우와 석방을 프랑스 정부에 촉구하는 한편, 나치에 협력한 혐의가 있는 주교들을 조사해 교회에서 퇴출시켰다. 1951년(69살)에는 [[바티칸]] 공식 옵저버로서 [[유네스코]]에 파견되어 총회에서 '유네스코는 인종과 언어와 종교를 가리지 않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내용으로 연설을 하였다. 다른 참석자들은 [[가톨릭]]의 대주교가 가톨릭 중심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고 놀랐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